블로그에 오랜만에 포스팅다운 포스팅을 하다가 문득, 오른쪽을 보니, '작성중인 글'에 '특명! 나를 파악하라.'라는 글이 있었다.
5월 12일자로 기록된 이 글은 아마도 올해 5월 12일자에 무언가 확신을 내리고 싶었던게다.
그래서 글을 끄적거리다 머리가 아파 아마 그냥 내려놓았을테고, 나는 그 상태 그대로 입대를 한게다.

입대 후, 1년.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생각이라는 것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아직은 부족해서 더 많은 것들을 읽고, 보고, 느끼고 있으며, 그 욕망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
구체화하는 과정만이 남아 있으며, 이제는 스물스물 자신도 생긴다.
그래서 본 글을 공개로 오늘 포스팅한 뒤, 또 다시 1년이 지날 때 즈음 (본론3)에 덧붙여 끄적여 보련다.

아래 글은 2009/05/12 03:26에 기록됨.


(서론)

중간고사를 보고, 다시 되짚어보기로 한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다.
헌데, 글을 쓸만한 여유가 잘 나지 않아 미루고, 미루다가.
비가 오는 이 날에.
어제도 늦잠 자서 지각이나 한 주제에.
현재 시각 오전 2시 40분.
이 글을 적어본다.
나를 되짚어본다.

특명.
나를 파악하라.


(본론1)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나는 장래희망에 항상 '컴퓨터 박사'라는 것을 적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웃집이나 친구분들의 컴퓨터를 집으로 가져와.
뚜껑을 열어서는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그 초록색 기판을 유심히 보시면서.
까만색은 배경이요, 하얀색은 글씨인데, 알 수 없는 영어로다라는 모니터를 보시면서.
또한, 그 알 수 없는 영어를 직접 두드리시는.

그런 아부지를 보면서 그저 나는 멋지다라는 환상에 허우적거리곤 했고, 그 때문에 나는 아무 생각없이 컴퓨터 박사가 되고 싶었다.
당시 어무니께서는 아부지의 직업을 소개하실 때, "아빠 직업은 컴퓨터 고치는 거야." 라고 하셨더랬고, 당연히 부모님의 직업군을 적을 땐, 아버지의 직업군란에 '컴퓨터 박사'라고 적고는 했다.

그게 왜 부럽고, 하고 싶었는지는 글쎄올시다이다.
항상 아부지께서 컴퓨터를 붙잡고 계실 때에 똑같은 자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래는 TV를 보거나 방에 있었지만, 나는 아부지께서 컴퓨터를 들고 오시는 날에는 그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더랬다.
나중에 컴퓨터를 고치고, 주인에게 돌려주는 때에 그 주인에게서 듣는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가 아부지를 멋지게 보이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욕심을 내어 아무지께 하나둘 도스 명령어를 배워나갔지만, 내 짧은 기억력은 그 한계가 너무나도 깊었다.
복사, 붙여넣기의 그 명령어를 외우지 못해 책상에 메모지를 붙여두었지만, 헛수고였다.
아마, 영어를 전혀 모르던 시절이어서 'COPY'라는 단순한 단어조차 그냥 알파벳 순으로 이해했을 터였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나는 윈도우즈 3.1을 보았고, 복사, 붙여넣기에 영어 따위는 필요 없잖아 라면서 윈도우즈 3.1 구동 방법만을 알아서는 이웃집 동생 녀석에게 게임을 복사 해 줄 때, 나는 윈도우즈 3.1를 구동시키곤 했다.
아마 내 기억엔 그렇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성격을 바꾸면서 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시야가 넓어졌고, 덕분에 나는 '꿈'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지만, 사실 거기서 거기였고.
결국 바뀐 것은 '컴퓨터 박사'가 아닌, '전자 공학 연구원'이라는 것으로 장래희망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고2 무렵에 컴퓨터 박사이시던 아부지는 퇴직을 하게 되셨고.
어머니께서는 "너도 나중에 컴퓨터 만지면 저렇게 된다."라는 말을 남기셨고, 아부지는 중국으로 떠나셨더랬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알지도 못하는 전자 공학 연구원 따위라는 허왕된 꿈이 아니고, PC 쪽으로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그런 상황이 닥쳐오자 나는 심히 당황했던 것 같다.
더불어, 고2 당시, 홀로 방황하기 시작하면서 네트를 허우적거리던 시절.
나는 웹의 무궁무진함을 알게 되었고, 내가 알던 인터넷이라는 것이 그냥 막연한 정보의 바다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며.
또한, 게이버, 대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세계가 포털 웹사이트에 가려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그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글을 만났고, 이후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으나 여기 본문에서만 필요한 것을 뽑아본다면, 어머니 말마따라 컴퓨터로 밥 벌어먹는 사람들은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꿈과 이상 그리고 현실에는 눈에 볼 수 없는 엄청난 간격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내가 전공을 선택함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나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내가 이전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저렇다라는 카더라 통신의 이야기도 있는데다가.
나의 하늘보다도 높았던 아버지의 위상이 현실의 장벽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으므로.
우선 당장의 위험 부담을 덜기 위해, 프로그래머 따위는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다만, 앞으로의 고찰을 위해 보다 광범위한 영역의 전자공학의 길을 택하여, 내가 지금까지 알아본 프로그래머의 길이 정말로 저런 것인지, 현실의 장벽은 대체 어느 정도인지를 탐구해보고, 다시 길을 선택해봐야 할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비록 학교는 내세울 곳이 되지 못했지만, 전자공학도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전자공학도의 인생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본론2)
대학교에 입학한 후, 그 이전보다 더욱더 네트에 뛰어들었고,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넓게 보기 위해 그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직접 경험하는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고, 우선 많은 것들을 보고, 듣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 경험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아부지께서 근무하시는 회사였으나 우리나라에서 IT라고 불리는 SI 업체에서 여러가지를 보고 배우고, 결론적으로 몸으로 뛰어봤으며, 뒤와 앞을 내다보는 시야를 갖게 되었다.
내가 했던 사회 경험은 단순한 아르바이트 그 이상이었다.

우선, 그 동안 내가 봐 온 것에 의하면, 어떤 언어이던 간에 프로그래머의 삶은 구차하다.
단,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만(!) 유독(!) 그러하다.
또한, 프로그래머의 삶만 구차한 것이 아니고, 모든 공학도의 삶은 대한민국에서는 구차하다.


내가 공학도가 되고 싶었던 것은 막연한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어쩌면 굉장히 단순한 이유였던 그것은 바로 기술을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게 하고 싶어서였다.
휴대폰부터 시작해 수많은 디바이스들을 보면서 하나같이 일반인들에게 어색하고. 기계 냄새 나고, 덕분에 어렵고.
그런 디바이스들을 보면서 꽤나 답답해보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학도가 되어서 뭐가 되든 사람들에게 보다 친숙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디바이스를 만드는 것을 꿈으로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전자공학도를 택했고, 그리 왔다.


하지만, 엄연히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현실을 보기 시작했던 나는 공학도가 되어 기술을 갖는 것만이 지폐를 쥘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했다.
누구 말마따라 "왜 공대에 들어왔니?"라고 물으면.
자신있게 "돈 벌려고요."라고 대답하지 못해서 이러저러한 이유를 붙이는 것도 같다.
잘은 모르겠다.



(본론3)
(여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파하는 것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게 되어 본론3으로 다시 시작한다.)

어쨌든, 중간고사가 끝이 났다.
나는 애초에 고등학교 시절, 공대생들의 찌든 삶을 보면서 굉장히 멋져보이곤 했더랬다.
기술을 익히려는 그 정신.
그 열정이 그리도 멋지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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