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렵게 이 글을 시작합니다.
돌아가신 분께 보내는 편지가 될지, 아니면 저 혼자만의 신변잡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문을 드리면서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묵념을 하면서 마자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어 이렇게 조촐한 글을 시작해봅니다.



당신이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지난 5월 23일 토요일 오전이었습니다.
나래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받고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나는 태연하게 PC를 켜 웹에 접속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늘 그랬듯이 저는 반응이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오랜만에 아침상을 같이 했지만, 저는 말이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당신이 '죽었다'는 말을 하면서 어머니께서는 '그러게, 왜 그렇게 비리를 많이 저질렀어.'라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셨습니다.
나는 밥만 먹고 외출 준비를 했습니다.

낮에 약속이 있었기에 외출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리고 동행한 나래는 당신의 죽음을 또 한번 '죽었다'는 표현으로 말을 꺼내더군요.
저는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면, '죽었다'는 표현이 아닌,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약속 장소에 나가서는 평소처럼 태연했습니다.
조금 기분이 착찹하기는 했어도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도 웃음이 잘 나지 않더군요.
이유는 잘 몰랐습니다.

오후 자락이 되어 집에 돌아와 네트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여부들을 확인하면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살아났습니다.
이내 나는 웹에서 보이는 글들을 북마크하면서 비록 댓글이지만, 하나하나 당신의 명복을 비는 글들을 작성했고, 비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느리게도 이제서야 머리 속이 복잡해지고,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슬퍼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생각이 복잡해져 써야했어야할 글을 한자락 주루룩 작성해보고 잠자리에 들려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나는 자주 가던 커뮤니티에서 봉하마을에 같이 가자는 분이 계셔서 쪽지를 주고 받고는 수원에서 출발할까도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음날에 선약이 있었고, 내가 빠지면 안되는 약속이었기에 휴대폰을 들었다 놓았다를 12시가 넘어서까지 고민하다가 이내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일요일이 되어 약속 장소에 나갔고.
집을 나서면서 이래서는 도저히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 옷걸이에 걸려있던 한번도 입지 않은 정장을 들어올렸습니다.
다행히 얼마 전 할인 기간에 부모님께서 언젠가는 필요할지 모르니, 하나 사두어야한다고 하셨던 정장이 있었더랬습니다.
나는 이 때에도 아무리 할인을 해도 돈이 드는 것 아니냐, 나 따위가 무슨 정장이냐라면서 손을 저었더랬는데, 이 때만큼은 부모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하지만, 정장 바지는 아직 밑단을 줄이지 않아서 입지 못했네요.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녀석이었더랬습니다.

약속 장소에 가서는 다음주에 있을 공연에 대비해보는 것이라며 둘러댔습니다.
자랑스럽게 당신의 조문을 가는 것이라고 말하지 못했고, 또 당신의 조문을 간다는 것이 그리 썩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왜 돌아가셨나요..

당신의 조문을 위해 찾은 시청광장 앞 대한문은 경찰 버스로 인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수 많은 사람들과 아무런 사심 없이 봉사해주시는 자원 봉사자분들 덕분에 보다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촛불을 켤 때엔 당신이 남겨준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해보기도 했더랬습니다.


분향소에는 아이와 함께 온 가족들도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심지어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듯한 아이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분향소를 찾았더랬고,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는 이것저것을 물어보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부러웠습니다.
돈이 많고, 집이 넓고, 차가 크고 따위가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렇게 존경해야 하는 분을 존경하며, 조문을 온 엄마와 아빠에 이끌려 온 아이들이 부러울 뿐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 날 집을 나서기 전에 어머니와 말 그대로 '한 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떠난 당일부터 집 안에서 '죽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더랬고, 이 날 아침에도 어머니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시기에 저는 이번에는 넘기지 못하고, 적어도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해야하는 것 아니겠냐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이야기가 아닌 지적이었겠지만, 어쨌든, 어머니께서는 당신을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속상했습니다.
나는 객관적으로 당신에게 있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며, 말씀드렸지만, 90%가 나왔으면 다 나온 것이라고 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나는 그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저 내 생각을 인정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말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어머니께서는 가족들끼리 이런 얘기도 편하게 하지 못하냐면서 목소리를 높히셨고, 저도 목소리를 차분히 하려했지만, 올라가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내 눈에 눈물이 고였더랬고, 어머니께서는 아들과 엄마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눈물을 고여가면서까지 할 중요한 이야기냐며, 손사레치셨더랬습니다.
나는 먹던 밥을 내려놓고, 내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지만, 이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게 하려 애를 썼습니다.


사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나 추억거리는 없었기에 나는 어제도 무덤덤하다고 느꼈고, 슬펐지만, 눈물 흘릴 정도의 비통함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집을 나서서도.
버스에 올라서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하다가 문득 하면, 눈물이 고이곤 했습니다.

물론, 버스에 올라서 어머니께 아들이 생각없이 굴어서 죄송하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더랬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내 자신이 슬퍼할 자격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더더욱 눈물이 고일 자격은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아마도 내가 당신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이 되던 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이전에는 아빠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는 아들이었지만,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이상하게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아들을 보면서, 얘는 어렸을 때는 물어보라고 해도 물어보지 않더니, 커서 다 물어보는 것 같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TV 뉴스에 나오는 하나하나가 모두 궁금했더랬고, 어른의 세계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아부지께 하나둘 세상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나는 이 세상의 약자들은 자신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고, 경쟁을 통해 사회는 성장한다는 사고 방식이 하나둘 자리 잡아갔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하나둘 이해하게 되면서 들었던 지금도 생각나는 의문은 다른 대통령은 모두 기간이 짧은데에 반해 왜 박정희는 그렇게 기간이 길었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점에 대한 답은 듣지 못한채 아부지께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 덕분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만을 들었고, 동시에 한 사회 집단이 크기 위해선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그런 아부지는 나에게 고등학교 이전까지 정신적 지주이자 롤모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부지와 함께 보았던 대통령 후보자 연설 및 토론 등을 보면서 아부지와 어머니께서 투표에 나서실 때에 나는 큰 목소리로 이모씨를 꼭 찍고 오라고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결과를 보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던 그 날에 무척이나 아쉬워했던 기억말이죠.
나는 TV에 나오는 노란 풍선이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당신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의 모습을 보면서 아부지와 쇼파에 앉아 쓴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당시에 보던 당신의 모습은 대통령 치곤 무척이나 가벼워보였고, 한 국가의 대통령이란 사람이 TV에는 왜이리 자주 나오고, 선생님들께서 자주 보는 것이 좋다고 하셨던 신문에서는 왜 이리 잘하는 것이 없는지 한심하기까지 했더랬습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 나는 웹을 하나둘 알아갔던 것 같습니다.
사실 나이 또래 애들보다 일찍이 웹을 알았던 나는 개인 홈페이지도 운영하면서 그 때부터 자유로운 웹이라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이내 공부공부공부 때문에 좋아하던 개인 홈페이지를 그만두고, 집-학교-학원이라는 루트만을 반복했더랬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 나의 정신적 지주셨던 아부지는 사업을 위해 중국으로 가셨더랬고, 그 동안 이 집의 기둥은 내가 되었더랬습니다.
동시에 나는 궁금한 것을 아부지께 물을 수 없으니, 가장 가까웠던 네트를 통해 하나둘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속에는 단순히 PC를 내 손으로 고치기 위한 것들도 있었지만, 그 외 세상에 대한 많은 것들을 하나둘씩 내 머리 속에 쌓아가기 시작했고, 내가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오류 투성이었음을 조금씩 알아갔지만, 고등학생인 내 머리로 그것들을 이해하기란 역부족이었습니다.


고3과 함께 나는 네트에 훨씬 더 빠져들었고, 정말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간접 경험하기도 하고, 네트와 현실의 괴리감 또한 알게 되었으며, 네트의 허무맹랑한 정보까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네트라는 것은 더욱 위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다수의 정보과 지식이 틀렸음을 구체적인 근거와 증거로써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내 기둥과도 같았던 철학관은 송두리째 뽑혀버렸으며, 조금씩 조금씩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다시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당신을 네트에서 다시 만났던 것은 바로 맨 위의 사진으로의 모습이 처음이었습니다.
부산에서 노태우 정권을 반대하며, 광주 항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당신의 모습을 나는 이 때에 처음 보고야 말았습니다.

약자란 노력이 부족해서만이 되는 것이라는 철학관을 이미 부숴버리고, 새로운 철학관을 넣고는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생각이 머리에 잡힐 때 쯤.
그리고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진실을 네트라는 공간을 통해 조금씩 알아갈 때 쯤.
그럴 때에 당신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고, 이후 당신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더 많은 걸 알아가면서 내가 어린 시절,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시절에 07년도 대선이 찾아왔고, 나는 아직 정치에 대해서 무언가조차 모른채 첫 투표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무려 20년 동안 쌓아왔던 철학관을 부수고, 새로운 철학관이 입각해 내가 투표한 첫번째 선거였습니다.

그리고 네트에 의존해 수 없이 더 많은 걸 알아갔습니다.
포털 웹사이트가 가리는 부분 말고도 더 많은 것들을 링크를 타고 타고 타고 가서 사진과 동영상, 다양한 시각의 글들을 통해 내가 갖고 있었던 생각에서 잘못된 것들과 비논리적인 부분을 조금씩 메꿔 나갔고, 그제서야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당신과 숭고한 목숨을 받친 분들, 살아계신 선배 어른분들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의 정신적 지주셨던 아부지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전에는 뉴스를 보면서 같은 이야기를 하던 아들과 아부지는 뉴스를 보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아들과 아부지의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도화선이 되어 나중에 터져버리고 말지만, 이전에 보던 아부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철저히 비논리적이고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주장을 펴고 계셔서 토론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조만간에 서로 객관적인 자료를 갖고 다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런 것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나는 그 동안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전혀 틀린 것이었음을 깨닫고, 그 날 당신에게 마음 속이었지만, 죄송했다고 사죄하였습니다.
나는 이 때서야 사람이란 대한민국에서 부르는 공부가 아닌 다른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그리고 나는 여전히 우리집이 너무나도 불편합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쟤가 80년대 태어났으면 데모나 나갔을 애라면서 친구 녀석에게 하소연하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결코 그럴만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어디 나가서 정치적인 인간이라고 불리울까봐 정치 이야기는 자신있게 하지 못하고, 더군다나 나는 그럴만한 이야기를 할 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동안 블로그에서조차 정치 관련해서는 단 한번도 포스팅하지 않았더랬습니다.
사실, 그것은 정치가 아닌 그냥 세상 이야기일 뿐이었는데도 말이지요.

친구들과도 괴리감을 느꼈던 나는 유일하게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 사회교육학과 친구 녀석에게 한번 우연찮게 하소연 따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 녀석이 유일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나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겠더군요.



여하튼, 나는 당신 덕분에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단순히 경쟁하여 짓밟지 않고, 같이 올라가야 하는 그 정점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많은 것들이 잘못되었음을 나는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런 당신이 살아계셨기에 제가 아닌 많은 사람들도 작은 희망이라도 갖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원망스럽습니다.
동시에 최근에 나왔던 비리 사건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수사 결과만을 지켜보았더랬는데, 이제서야 당신의 외로움이 보이네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나는 당신이 떠나면서 준 뜻을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이 글을 적고나서 후련했으면 좋겠는데, 그러진 않겠지요.
내일부턴 다시 본업에 집중하고자 하는데, 뜻대로 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세상에 대한 더욱더 많은 관심을 갖고 행동으로 옮기겠습니다.
비록, 어머니께서는 특이하고, 데모 따위나 나갈 것 같은 아들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럴만한 인물도 아니거니와 아직 너무 많은 것들이 부족합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본업에 하루하루 더욱 더 최선을 다하고, 세상에 관심을 두고, 행동으로 옮기는 이가 되어보겠습니다.



2008년의 위에서 쓴 바로 그 날에.
나는 생전에 찾아뵈어, 당신은 듣지 못할지라도 그 동안 너무 몰라뵈서 죄송하다고 한번 외쳐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람 인생은 모르는 것이라고 하더니, 당신은 그것조차 허락해주지 않았네요.

죄송하고, 죄송합니다.
당신의 뜻을 이제서야 기리고, 저도 남들처럼 이제서야 당신의 기록들을 다시 들춰보고 있지만, 여전히 죄송합니다.

사후 좋은 곳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편하니 가시고..
대한민국이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지켜봐 주시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5월 23일을 기억하며..





2009.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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