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한참이나 늦었지만, 나는 포스팅을 하지 않았더래서 지금에서야 포스팅을 끄적거려본다.


2009년 5월 29일.

그 날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을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국민장으로 치뤄진 이 날의 서울의 모습은 이 날 서울 도심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영결식에 참가했던 하지 않았던 잊혀지지 못할 것이다.

약 3주가 지나버려 어렴풋이 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영결식 때에 느꼈던 감정과 느낌 정도는 마음 속에 잘 간직하고 있다.


이 날에 꽤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금요일은 전자공학과 학생들이 실험 과제를 내는 날이었고, 나는 영결식을 위해 목요일 밤까지 무사히 실험 레포트를 마치었지만, 과제는 분명히 금요일 6시에 내야만 했다.
레포트를 끝마칠 적에는 과 친구에게 영결식에 가려는데, 레포트를 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하고, 금요일 아침에 내 레포트를 건내 주기로 했었으나.
금요일 아침에 집을 나선 나는 학교를 가지 않고, 곧장 서울 시청으로 향했더랬다.
그깟 레포트 조금 늦게 내지무얼..이라는 못된 심보였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서울역 앞에 내렸다.
영결식에 참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기 위함도 있었고, 전에 대한문에서 인사를 드렸지만, 그 때 드리지 못한 말씀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드리기 위함이었다.
(사실 나는 영결식에 '참여한다'라는 표현이 매우 어색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 서울역 분향소 - 2009년 5월 29일 금요일 서울역 앞.


서울역의 구건물에 자리 잡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분향소는 시민들이 설치했던 대한문 분향소보다 훨씬 더 으리으리했다.
분향소를 보고는 '가로수까지 뽑았다던 분향소가 여기였구나.'싶었더랬고, 여전히 사람들은 길지 않지만, 줄을 서서 조문을 드리고 있었다.

나 역시 줄을 서서 국화꽃을 받고, 대한문에서와는 달리 조문을 위한 검은 근조 리본을 달고.
이로써 세번째이자 마지막인 조문을 드리며 방명록에 드리고픈 글을 적고, 길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을 건너 서울시청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갔다.
지하철역을 나서는 곳부터 벌써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 같았다.

사실, 인천에서 길을 나서면서 이전에 청바지를 입었던 것이 너무도 거슬렸었기에 이번에는 완벽히 정장을 입고 길을 나섰더랬다.
이 날은 날씨가 제법 더운 날이었기에 반팔 셔츠를 입은 사람이 꽤나 많았더래서 조금 이상한 느낌도 들었으나, 서울에 가면 다른 분위기겠지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서울시청역에서 지하철을 내릴 때까지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싶었다.
지하철역에서 계단을 올라오면서부터 잘 찾아왔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을 뿐.

또한, 작년에 나가던 촛불집회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서울에서 북치고 장구 치고 해봐야 인천에서는 전혀 미동도 없다는 것.
그래서 언론이라는 것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
하지만, 국내 언론은 무엇하나 믿을 것이 없다는 것.
그래서 블로거들과 수 많은 네티즌들이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외치지만, 안보는 사람은 안본다는 것.

그 차이일거라.

길 위의 노란 풍선들.


사진처럼 길 위에는 노란 풍선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사진에는 고작 5개의 풍선 뿐이지만, 사실 앞뒤 공간도 없을만큼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자칫하다가는 사고가 날 정도의 인파였더랬다.
늦게 왔다고는 생각치 않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더랬다.

서울 시청 앞의 사람들.



나이층은 제각각이었고, 정말 정말 사람이 많았다.
나중에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최대한 앞까지 나아갔지만, 결국 영결식 추모 공연 등의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위 사진을 찍은 자리에서는 추모 공연을 온 가수들의 모습은 커녕 시청의 스크린조차 보기 어려웠는데, 그나마 소리라도 들렸으면 좋겠것만, 그렇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스피커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뭐라고 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지.
특히, 김제동씨가 나와서 적지 않은 이야기를 했는데, 나중에 클리앙 분들을 만나서고야 대략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영정 차량이 지나가는 모습.



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영정 차량을 뒤따르는 시민들.


그렇게 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영정 차량은 지나갔다.
많은 시민들은 영정 차량을 뒤따랐고, 또 다른 많은 시민들은 쓰레기를 치우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뒤늦게 클리앙분께서 보내신 문자 메시지를 받고는 연락을 드렸고, 그 분들을 뵙기 전까지 시민들과 쓰레기를 줍고 있었더랬다.
클리앙 분들을 뵙고는 호텔인지 뭔지를 잡으셨다는 말씀에 당황하기는 했으나, 관계자는 예약된 인원만 들어갈 수 있다는 조금 답답한 규정 이야기를 했더랬고, 여차여차해서 우리는 서울역에 도착한 영정 차량의 소식을 듣고 그 많은 인파의 모습을 영상이지만, 바라보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뒤늦게 영정 차량의 위치를 추적해 뒤따라갔지만, 역부족이었고, 이후 사람들은 다수 해산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들은 이야기지만, 영정 차량 앞으로 갑자기 경찰들이 등장해 예정된 길이 아닌 방향으로 영정 차량을 이끌었고, 이에 차량에 탑승했던 관계자들과 시민들이 예정된 길로 방향을 바꾸기도 했더란다.
당시에는 들은 이야기였지만, 이후 나는 네트를 통해서 영상으로 이 모습을 직접 확인했고, TV에서는 어김없이 시민들 때문에 영정 차량이 이동을 쉽게 하지 못했다는 보도를 내뿜고 있었다. (...)


우리는 무작정 길을 걷다가 꽤 많은 길을 걸었을 때에 보니, 또 다른 클리앙 분들이 중간중간 모여서 꽤 많은 수를 이루고 있었다.
19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잠시 앉아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하고, 서울 시청으로 향해 시청 앞에서 자리를 만들어 앉아 있다가 호프집으로 들어가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왜 나라에 대해 쓴소리를 해야하고, 복잡한 정치 이야기를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래야만 했다.

호프집에서 TV를 통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화장 소식을 보고, 이렇게 되는구나..라는 생각도 들고는..
마자 우리는 잔을 비우고, 일어나 자신의 위치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남을 사람은 남기로 했다.

나는 남았다.


시청 앞에는 적지만,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시간까지 앉아 있었다.

일부는 슬퍼서.
일부는 비참해서.
일부는 안타까워서.
일부는 답답해서.
일부는..

그렇게들 각자 오묘한 감정과 생각으로 자리를 앉아있지 않나 싶었다.

나는 또 다른 클리앙 분들을 만나 이번에는 제법 심각한 정치 및 시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 할 점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답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괴리와 관심 있는 자들만의 관심, 외치는 자들만의 외침 등으로 압축되는 듯 싶었지만.
결국 이미 다들 알고 있었다시피 '생활 정치'를 통해 주변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쉬운 답이라고 결론내려졌다.

11시가 지나자 방패 너머로 경찰은 해산해달라는 소리를 던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내 직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찰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우리가 마시려고 샀던 음료는 인터넷 방송 팀들에게 격려를 하며, 드리고는.
우리는 언제 어떻게 일이 벌어질지 몰라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간 다시 볼 지 모르는 서로의 닉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각자 오늘의 소감과 느낌을 간략하게 이야기한 뒤.
서로 모두들 악수를 나누며, 감사하고, 수고했다는 인사들을 나누고..

다시 앞을 돌아보며, 경찰들과 대치했다.


12시가 가까이에 오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긴장하는 듯 싶었으나.
이내 지금까지 보아왔던 시민들이 그러했듯 노래를 부르며, 그 장소, 시간, 분위기.
그것들을 모두 함께 즐기고 있었다.
즐길 수 없지만, 즐기고 있었다.


이내 나는 서울역으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피곤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잠은 커녕 또 다시 네트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2009년 5월 29일은 지나갔다.

방패를 든 경찰과 물대포 차량 앞에 서 있는 시민들 - 2009년 5월 29일 서울 시청 앞.






(방패를 든 경찰과 물대포 차량 앞에 모여 있는 시민들 -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2009년 5월 29일 저녁 서울시청.)



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
당신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자 꿈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고 싶기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위하고.
전국민이 다 함께 어울려 먹고 사는 데에 걱정 없는.
그런 나라와 세상을 꿈꾸며, 당신을 희망으로 삼았을 겁니다.
아니, 적어도 나는 말이죠.

당신이 떠나면서 희망이 없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음을.

하지만, 그런 뜻이라고 당신이 떠나간 것은 아니겠지요.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크게.
보다 더 오래.

노력하고, 꿈을 꾸고,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2009년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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